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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2026년 3월 28일9분 읽기1 조회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나는 읽을 책을 선정하는 나만의 조건이 있다. 내가 믿을만한 평론가가 추천하는 책은 꼭 구해 읽으려 노력한다. 평론가로서는 성실하고 꼼꼼하기로 소문난 신형철 교수의 평과 이동진 선생의 추천이라면 한번 쯤 관심을 가져볼 만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책이다.

김애란은 「홈 파티」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24쪽) 타인의 공간을 방문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확장의 길이 될까, 아니면 서로의 기준을 꺾어 누르는 침입의 길이 될까. 홈 파티의 주인공(?)인 이연은 부유하고 그만큼 자신감을 가진 타인을 방문하면서 확장과 칩입이라는 두 가지의 길을 열었다. “이연은 자신이 대상을 편견없이 대하는 태도에 작은 만족을 느꼈다.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다 수양의 결과였다. '어렸을 땐 정말 타인을 시시콜콜 판정했는데.. 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23-24쪽). 나는 이 부분에서 깜짝 놀랄만큼의 희열을 느꼈다. 먼저 독자들을 특유의 김애란식 프레임으로 가둔다.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다 수양의 결과였다”는 부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독자 중에 타인을 판정해 온 사람은 자기 자신을 수양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섬뜩한 말이었했다.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24쪽). 이건 그 집에 방문하여 얻은 확장된 인식이었다. 그러나 성민의 다음 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는 성민이 “사실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그간 저나 제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응,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28쪽). 이런 장면에 영향을 받아서 이연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사회 의식이 작동한다. 고아원 아이들은 18세가 되면 사회로 나가야 해서 500만원의 정착금을 준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돈으로 명품 가방을 산다는 것이었다. 이 이해되지 않은 것 같은 행동에 대해 사회학적 의식이 발동한 것이었다. “그때 이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일 잘 감출 수 있는 거라 그런거 아닐까요?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39-40쪽) 특히 이 부분이 김애란을 사회학자라고 표현한 신형철 교수의 평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나는 이 말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부족한 가능성인 창의성을 길러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는 말은 별다른 고민없이도 그냥 튀어 나올 수 있는 상식적인 말인 반면에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어떤 현상을 보고난 후 수많은 고민과 반성이 필요한 창의적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이런 태도가 필요한 건 아닐까?

김애란은 이 책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나름의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사회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해버린 것은 무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공동체, 이웃, 연대”와 같은 단어들이 소설 속 인물의 입을 통해 정직하게 발설될 때(좋은 이웃,125쪽) 저변이 넓어지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사회가 더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좋은 이웃, 141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반성을 많이 했다. 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항상 주위를 둘러보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가슴아파 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작가의 말 또한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앞으로도 저는 여전히 삶이 무언지 모른 채 삶을, 죽음이 무언지 모른 채 죽음을 그릴 테지만,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을 새로 배워나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다가오니까요”.(작가의 말,316-317쪽) 연구하는 학자의 삶은 항상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하지만 가끔은 현실을 잊은채 이론이나 통계수치에 매몰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블로거 몽쉘로그의 평처럼 “불안정해지고, 불안정해진 삶이 다시 타인을 향한 마음의 폭을 좁혀가는 과정은 개인의 성정이라기보다 사회가 빚어낸 결과에 가깝다.”라고 하여 자기 자신의 책임보다도 바로 사회의 책임이라고 하여 얼마 동안은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애란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지만 왠지 읽기가 편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솔직하게 이루어지도록 상황을 자연스럽게 구성한 점이 특히 끌렸다. 어차피 소설이기 때문에 작가가 구상한 틀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고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내 마음을 다 드러내놓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것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근원적으로 자극하는 그녀 만의 방법이다. 다른 책들과 비교해서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글을 읽어가면서 그 다음에 나오게 될 장면을 자연스럽게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작가의 숨겨진 실력이다. 김애란 소설은 하나의 글 단락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흔한 경험들처럼 작은 조각들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 경험들은 묘하게도 절묘하게 잘 짜여 하나의 소설로 변해 간다. 그리고 느지막한 배움 하나, 요즘 부동산사무소에서나 친척이나 친구가 집에 방문해 들어오는게 여주인의 입장에서는 호의적인 방문이 아닌 부정적인 침입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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